화온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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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살아가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화성에서 온 아이 2023. 4. 10. 14:34
 
깊이에의 강요(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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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출판
열린책들
출판일
2014.07.20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1949년 5월 26일 독일의 남부 도시 뮌헨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프로방스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작가로 활동했다. 이전에 읽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샐린저'보다 더 사생활에 대한 정보가 없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2009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체의 언론 노출,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쓴 문학만큼은 많은 매년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다음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들 중 일부이다.

 

  • 콘트라베이스(Der Kontrabass)
  •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Das Parfüm)
  • 비둘기(Die Taube)
  • 좀머 씨 이야기(Die Geschichte von Herrn Sommer)
  • 깊이에의 강요(Drei Geschichten)
  •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 영화는 전쟁이다(Rossini : oder die mörderische Frage, wer mit wem schlief)
  • 사랑의 추구와 발견(Vom Suchen und Finden der Liebe)

 이번에 읽은 책은 1995년에 한국에 출판된 "깊이에의 강요"인데 3개의 단편 소설(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과 1개의 에세이(문학적 건망증) 순서로 나와있다.

 

◆ 깊이에의 강요

한 젊은 여류 화가를 소재로 하여 쥐스킨트가 즐겨 다루는 예술가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의 축은 자신의 예술에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듣고 번민하고 고뇌하다 죽음을 선택하는 예술가와, 그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논평으로 본의 아니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어느 평론가, 두 사람이다. 평론가는 그녀의 죽음 후 관점을 180도 뒤집어, 그녀의 그림에는 삶을 깊이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읽을 수 있다는 글을 쓴다. -96p~97p(옮긴이의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논평(論評)'이란 '어떤 글이나 말 또는 사건 따위의 내용에 대하여 논하여 비평함. 또는 그런 비평."을 뜻하는 명사이다. '평론가(評論家)'는 평론을 정문으로 하는 사람으로 '비평가'와 유의어이다. '비평(批評)'은 '1)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2)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러쿵저러쿵 좋지 아니하게 말하여 퍼뜨림.'의 명사이다.

 

 "깊이에의 강요" 단편은 상황에 따라 쉽게 자신의 견해를 뒤집는 평론가의 일관성 없는 행동과 그의 비평으로 절망하다 죽음을 선택한 젊은 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평론가는 그저 본인의 "일"을 했을 뿐이다. 거기에 "인류애"가 있고, "일관성"이 있냐의 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작가 쥐스킨트는 평론가라는 직업을 작품에서와 같이 자신의 견해를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일"하는 사람으로만 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어 언론 노출을 꺼리고 누군가에게 굳이 공식적으로 논평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과연 "깊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깊이'란 '1) 위에서 밑바닥까지, 겉에서 속까지의 거리. 2) 생각이나 사고 따위가 듬쑥하고 신중함. 3. 어떤 내용이 지니고 있는 충실성이나 무게.'라는 명사와 '1) 겉에서 속까지의 거리가 멀게. 2) 생각이 듬쑥하고 신중하게. 3) 수준이 높게. 또는 정도가 심하게.'라는 부사이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11p

 아마 평론가가 말한 깊이는 명사의 3번째 뜻 "어떤 내용이 지니고 있는 충실성이나 무게."라는 뜻일 텐데 깊이가 없는 것은 애석할 일인가?부터 생각하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젊은' 여류 화가이기에 '나이가 있는' 화가보다 경험에 대한 차이 때문에 깊이가 없을 수 있다. 깊이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책에서 젊은 여류 화가는 '깊이'를 찾기 위해 미술 서적을 보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서점 점원에게 깊이 있는 책을 묻고, 미술 교사에게 그림의 깊이에 대한 질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깊이'의 답을 찾지 못한 화가의 삶은 점점 망가졌고 죽음을 선택했다. 점점 매몰되는 사람의 모습을 짧지만 강렬하게 적었다. 그녀에게는 평론가의 말처럼 '깊이'가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내 전문 분야로 비추어 생각해봤다. 상대적으로 권위있는 누군가가 나의 일, 업적, 성과에 대해 "잘했는데 깊이가 없네"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젊은 여류 화가처럼 "깊이가 없네"에 집중하여 깊이를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진 않더라고 "깊이가 없네"보다 "잘했는데"에 초점 맞추기 어려웠을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주변에서도 권위 있는 자와 똑같은 말을 한다면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히 여류 화가를 보며 답답하다 느끼기보다 '나라면?'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 "깊이에의 강요"였다. 비평에 휘둘리지 않고, 참고 정도로만 생각하며 내 삶을 살아가고, 나의 강점을 더 부각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소설 속 주인공 젊은 여류 화가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즉, "깊이"보다 "단단함"이 그녀에게 먼저였다. 그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내가 단단한지 되돌아본 시간이었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11p

 평론가는 어떠한가.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던 비평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악의 없이, 오히려 좋은 의미로 한 말이 오해를 받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말은 그런 것이다. 과연 평론가에게 "당신이 한 말 때문에 한 화가가 죽음을 택했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초대 전시회에서 했던 평론과 사후의 평론이 달라지니 당신은 깊이가 없군요"라 말할 것이다. 이 또한 나의 악의적인 의도는 없을 것이다.

 

◆ 승부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삶의 축소판이다. 삶과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해 어느 정도의 것은 얻었지만, 현재의 나를 지키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의 고수 장, 인습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서 정열적으로 용기 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리고 장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수 없는 뱃심도 없는 나머지 구경꾼들. -97p(옮긴이의 말)

 "승부"는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한 듯 다르다. "승부"는 젊음을 대단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깊이"라 말할 수 있는 "연륜"은 보수적인 것이라며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으론 "안정"과 "도전"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승리가 확실한 "안정"과 승리할 수도 있는 "도전"에서 항상 사람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어느 쪽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나는 옮긴이의 말처럼 "장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수 없는 뱃심도 없는 나머지 구경꾼들"인 것은 아닐까.

 

◆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세계와 인간이 점점 돌조개로 변화하고 있다는 독창적이고 기발한 착상을 토대로 하고 있따. 삶에 짓눌려 내면의 아름다움과 감수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의 모습이 생명은 있으되 무감각하고 냉혹한 돌조개를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98p(옮긴이의 말)

 '세계와 인간이 점점 돌조개로 변화하고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너무 말도 안되는 말이고, 소설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줄거리를 타인에게 들었을 때 했던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런 생각도 안하면서'라 바뀌었다.

상상하는 것이거나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을 주장하고 있다고 여기에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해가 거듭될수록 네 몸이 화석처럼 굳어 가고 무감각해지며 육체와 영혼이 메말라 가는 것을 너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가? 어린 시절에는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구부렸으며, 하루에 열 번 넘어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열 번 일어났던 사실을 이제 잊었는가? -71p~72p

 "승부"에서 나온 '젊음'과 '연륜'을 "장인 뮈사르의 유언"에서는 노화를 조개로 되어가는 과정으로 말한다. 나는 지금 어떤 노화 과정에 있는걸까?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단단해진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다시 "깊이에의 강요"에서 말한 "단단함"으로 돌아간다.

 

 

◇ 문학적 건망증

쥐스킨트는 직접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문학 작품과 우리의 삶은 어떠한 함수 관계 에 있으며, 삶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99p~100p(옮긴이의 말)

 내가 읽을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가? 세부적인 건 몰라도 어떤 줄거리였는지는 다 기억한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쥐스킨트는 30년 전에 읽은 책의 내용도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고등학생 때 읽은 문학책들의 내용이 기억 안 난다. '재밌게 읽었는데'라는 느낌만 남아있을 뿐이다. 비문학도 마찬가지다. '감동적이었는데'라는 감상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내 삶은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은 어떠한가?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나는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서가로 걸어가 꽂혀 있는 책들을 쭉 훑어본다. ···
곧 나는 좋은 책을, 그것도 아주 썩 좋은 것을 집었다. ··· 결코 알지 못했던 흥미 있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굉장한 놀라움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매순간 나도 내가 체크해 놓은 부분이 아니면 한 번에 찾아가기 어렵다. 읽은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책 리뷰를 쓸 때면 항상 책을 키보드 옆에 둔다. 필요할 때 항상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다 언젠가 내 머릿속에서 잊혀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몇 십 년 뒤에 이 책을 보고 다시 한번 새롭게 "단단함"을 느낀다면 나는 이 책을 과거에 읽었다 말할 수 있을까? 읽었던 기억이 나중에는 "봤는데"로 바뀌지 않을까.

 


 11p "깊이에의 강요" 단편 소설로 시작하는 책 "깊이에의 강요"는 100p 옮긴이 김인순의 "옮긴이의 말"로 끝이 날만큼 얇은 책이다. 그렇지만 한 편 한 편 생각할 것이 많은 작품으로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줬다. 지금 나는 타인에게 휘둘리고 있는가? 지금 나는 젊음을 부러워만 하는가? 지금 나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나는 책을 통해 내 삶이 변화되고 있는가?

 

 

나만의 한줄평

: 한 편을 읽은 시간보다 한 편을 읽고 난 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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