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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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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고

화성에서 온 아이 2023. 7. 5. 11:13

 사회심리학 분야를 새롭게 열었다고 평가받는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교양수업이든 전공수업이든 "심리"가 들어간 모든 것에서 에리히 프롬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올해 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완독 못했다. 이해될 듯 이해되지 않는 문장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아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인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고, 조금은 에리히 프롬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명실상부한 사랑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이제 《사랑의 기술》이 말하는 관계의 사랑을 넘어, 보다 더 근본적이고 모든 사랑의 핵심인 ‘삶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자신을 미워하며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를 분석하고 삶을 사랑할 자유에 대해 통찰한다.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미발표 작품으로,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8년을 함께한 조교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라이너 풍크 박사가 유작을 엮었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사랑하는 능력의 상실을 현대인의 핵심 문제로 삼으며, 경제, 사회, 정치, 노동과 연계해 깊이 성찰한다. 나르시시즘, 이기주의, 결핍, 소외 등 심리적·정신적 관점부터 대량생산, 기술 맹신, 경제적 과잉 등 사회경제적 조건까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이유를 탐색하고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살아 있음의 철학이다.
저자
에리히 프롬
출판
김영사
출판일
2022.02.11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현대인이 소외당하는 이유를 파헤치고, 인간 내면의 진정한 해방과 사회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꿈꿨다. 자유 대신 복종을 선택하며 나치를 탄생시킨 독일인의 심리를 분석하고, 베트남전쟁과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앞장섰으며, 소비주의에 빠진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실천적 학자다.

- 저자소개 中

 

 에리히 프롬(1900~1980)은 독일 철학자로 휴머니즘 철학자라고 한다. 인본주의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계에 널리 퍼뜨렸다. 군국주의와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이 모든 것의 해답으로 사랑을 제시했다.

 

인간을 종속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원인이 외부의 거대한 힘 때문이 아니라면 무력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 내면이 무력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 라이너 풍크 서문 中

 *라이너 풍크(Rainer Funk)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엮은이로 국제 에리히 프롬 협회 이사이다.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8년을 함께한 조교로 에리히 프롬 문헌실을 운영하며, 유고를 관리한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e-book 표지

 근래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밑줄 친 책이 아닌가싶다. 사실 반 정도 읽었을 때는 사랑의 기술처럼 '이 책을 내가 완독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완독 한 지금은 이 책을 중도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한다. 누군가는 전반부가 더 마음에 들고 후반부로 갈수록 별로라 했지만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더 생겼다. 책은 점점 쌓이다가 마지막 하고 싶은 말로 이어진다. 나의 현재를 바라보면서 책에 빠져 읽었다.

 

 나는 밀리의 서재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책을 읽었는데 소장하고 싶은 책이여서 곧 서점에서 구입할 예정이다. 아래는 내가 밑줄 친 내용 중 일부로 e-book에 나와있는 페이지로 기록했다.

 


1.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생명체는 더 완벽하고 완전하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안에 담기지 않은 것으로 자라날 수는 없다.
 삶은 항상 과정이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기존 구조와 태어난 환경이 주고받는 끝없는 상호작용 과정이기도 하다. -29p
실제로 현재 우리 문화에는 우리도 이미 전염되어 생명 없는 모든 것에 은근히 끌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심각한 증상이 나타난다. ··· 일단 순을 한잔 마셔야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마음이 편해진다. 그 행사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억지로 유쾌한 척하고 일부러 걱정하는 척한다. 우리는 행사(결혼식, 장례식, 화가의 전시회)에 어떤 것이 잘 어울리는지 느끼려 하지 않고 점점 더 생각하려한다. -43p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면,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불안하고 수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실험이 얼른 끝나기만을 고대하는 것 말이다. ··· 무엇보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보다 결과에 더 치우친 우리의 관심이다. 하지만 산업 생산 분야에서 결과를 내는 것은 기계와 장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마저 기계로 생각해 빠른 결과를 얻고 싶어 하고 원하는 효과를 성취할 수 있는 장치를 찾아다닌다. ···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문화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자세를 경험하기 힘들다. ···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44p~46p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고통은 변화의 산파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무관심이 운명을 바꾸는 인간의 능력을 짓밟아버릴 것인가? -49p~50p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20세기 익명의 권위는 어떤모습일까? 그것은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모두가 하는 행태이며, 남들과 같길 원하는 바람이며, 무리에서 멀어지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면서 모두는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바깥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 존재할 뿐, 우리가 입으로만 신봉한다고 고백한 목표, 즉 완전한 인성 발달, 완전한 인간 탄생과 성장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꾼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60p~61p
오늘날엔 대부분 평등을 동일로 이해한다. 동등하다는 말을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논리를 펼친다.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과 같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하지 않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64p

 문득 예전에 종종 들었던 "한국사람들은 다 똑같아!"라는 평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성있는 사람을 희망하지만 타인의 눈에 튀는 사람은 되고 싶어 하지 않다. 무난하게 남이 하는 대로가 늘 듣던 말이어서 나도 그러려니 했는데 어쩌면 무난하게 남이 하는 대로 해야 평등하다고 자연스럽게 넘어가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가령 책을 한 권 읽는다고 치자.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이해한다. 그게 전부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하게 소비자의 자세다. 하지만 그 책이 좋은 책이라는 전제하에 작가가 말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도록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실제로 읽는 것이고, 책을 읽고 난 나는 달라진 인간이다.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 책을 그저 소비한 것이다. -72p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비자의 자세에서 책을 실제로 읽은 달라진 인간이 되었다고 믿고싶다.

 

자기 나무나 꽃, 풍경을 보는 화가는 나무가 예쁘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무의 이름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두는 것은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 "내가 당신을 본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을 볼 수 있을 때 지나온 삶을 알아야 한 사람을 안다는 어리석은 생각 역시 버릴 것이다. -75p~76p

 영화 '아바타'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인사할 때 혹은 인정할 때 'I see you' 즉, '당신을 봅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3. 이기심과 자기애

이기심과 이웃사랑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세대를 이어 수백만 아이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다음 내용을 포함한다. 네가 바라는 것을 하지 말고 부모의 권위를 위해, 더 자라서는 사회의 권위를 위해 너의 의지를 꺾어라! 결국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칼뱅주의에서 목격한 바로 그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의미를 제외하면 그 문장의 뜻은 이것이다. '너를 사랑하지 마라' '너 자신이 되지 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는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종하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라는 문장은 인격의 자발성과 자유로운 발전을 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이념적 도구 중 하나가 된다. 이런 교훈의 압박에 짓눌려 인간은 온갖 희생과 완벽한 복종을 요구받는다. 자기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혹은 자기 바깥은 무엇인가에게 유익한 행동만이 '이타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91p

 

자기관계와 대상관계의 일치

심리학의 관찰 결과는 '자신을 향한 사랑'과 '타인을 향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대립하며 서로를 배제한다는 이론을 입증하는가?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은가?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둘은 대립하는가? ··· 타인을 향한 사랑과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은 타인을 향한 증오와 자신을 향한 증오와 마찬가지로 양자택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는 조금이나마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만 보면 정반대 같지만, 자신을 향한 증오 역시 타인을 향한 증오와 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해 사랑도 증오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과 타인에게 향하는 감정은 원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98p~100p

 

증오와 자기 증오

반응적 증오는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상황이다. 성격으로 인한 증오는 반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적개심이 상황으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증오가 활성화되면 마치 숨어 있던 적개심을 표출할 합당한 기회를 찾아 기쁘기라도 한 듯 당사자에게서는 안도감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런 사람은 증오심을 느낄 때 특별한 만족과 즐거움을 보인다. 이것이 반응적 증오에는 없는 점이다. -102p

 '적개심을 표출할 합당한 기회를 찾아 기쁘기라도 한 듯'이라는 부분에서 진상고객과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당연할 권리를 적합하게 요구하는 것은 욕설이 오가지 않는 한 정당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간혹 사회 통념상 불가한 것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거절하면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이 성격으로 인한 증오라고 생각된다. 가스라이팅 또한 비슷하다. 위에 말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행동일 수 있으니 이는 증오를 억누를 사람이 건덕지를 찾으면 더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자기애 결핍은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노예로 부린다. 자기 바깥의 주인을 섬기는 대신  주인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았다. 이 주인은 엄하고 잔인하다.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즐거움과 만족도 금지한다. 주인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려면 몰래 해야 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결과 놀이도 노동과 똑같이 강제성을 띠게 된다. 계속되는 조급증이 삶을 좌우하고, 그 조급증은 놀 때도 멈추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은 이런 쫓김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114p

 '조급증'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에 자주 언급되는데 나도 '이런 쫓김'을 전혀 인식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과연 양심의 가책을 대가로 치르지 않았던 즐거움과 만족이 근래에 있었을까?

 

사랑은 열정적 긍정

인류애는 개인을 향한 사랑의 조건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 나의 삶, 행복, 성장과 자유를 긍정하려면 그런 긍정을 하겠다는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그럴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다. 다른 이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사랑은 증오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나눌 수 없다. -125p

 

자기애와 이기심

이기심Selbstsucht은 '중독Sjcht'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독일어 '이기심Selbstsucht'은 그대로 옮기면 자기 중독이라는 뜻. 즉 이기심 안에 '중독Sucht'이 들어 있음-옮긴이) 일종의 탐욕이다. 모든 형태의 중독이 그러하듯 이기심은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끝없는 불만의 결과다. 탐욕은 밑 빠진 독이다.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려 무한히 노력하다 지쳐 쓰러지지만 결코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129p
대다수의 잘 적응한 사람들의 경우도 정상이란 그저 어린 나이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회가 제공한 사회적 자아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신경증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짐에 따라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불화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133p

 

4. 창의적인 삶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최고의 대답은 이렇다. 창의성은 보고(혹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창의성에 대한 정의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들은 하나의 대상(장미)을 보면서 자신이 본 대상이 '장미'라는 개념에 해당하며, 이런 이유에서 '나는 장미를 본다'는 단정이 옳다고 확신한다. 얼핏 여기서는 강조점이 보는 행위에 찍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순전히 인지적인 이해와 그것의 언어화다. 이런 방식으로 장미를 본다고 단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이 말을 배웠다고 단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구체적 대상을 인식하고 올바른 단어로 분류하는 방법을 배웠다. -138p~139p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이른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의적으로 살 것이다.
 한 사람을 그의 온전한 현실에서 바라보는 경험은 때로 갑작스럽게 느껴져 깜짝 놀랄 수도 있다. -143p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미 다음 일을, 지금 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는 순간을 생각한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으며,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일이 자기 힘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할 땐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147p

 에리히 프롬이 말한 "진정으로 집중할 땐 지금 이 수간에 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를 읽으며 박웅현 저자의 책 "여덟 단어"가 떠올랐다. 책에서 밥 먹을 때 늘 신문을 보던 자신이 신문을 놓고 나서야 밥맛을 느낄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끔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불안 증세가 있는 건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프롬에 따르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창의성의 또 한 가지 조건은 양극성에서 생기는 갈등과 긴장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런 생각은 갈등은 최대한 피하고 보자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된다. ···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착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가 맞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키우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151p~152p
양극성은 수많은 차원에서 존재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기질의 양극성이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가장 중요한 양극성이다. 그 양극성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평준화로 흘러가버린 그릇된 동등권 사상 탓에 우리는 이 양극성을 심하게 축소했다. ··· 평등이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인간 존엄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타인을 착취하는 데 차이를 요구하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동일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져 있다. 나는 이런 입장을 극복해야만, 동일의 자리에 다시 진정한 평등을 앉혀야만 창의성이 자랄 수 있다고 확신한다. -153p~154p
사고와 감정으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용기와 믿음이 없다면 창의성도 없다. 따라서 창의적 자세르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둘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나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세다. 창의성 교육은 삶의 교육과 같은 뜻이다. -156p

 "창의성 교육은 삶의 교육과 같은 뜻이다"라는 말은 현재에 집중하고 개념화, 언어화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창의성 교육은 지금 나에게도 필요하며 앞으로도 계속 보고 대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교육일 것이다.

 

 

5. 죽음에 대한 태도

사는 동안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긴 하지만 죽음을 실질적 가능성으로 경험할 수 없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다. '불멸의 착각'은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인하는 우리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60p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자아를 초월한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166p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뱃사공의 태도와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자아를 초월한 사람의 눈은 맑고 평안해 보인다는데 소설이긴 하지만 뱃사공의 눈도 그러지 않았을까.

 

6. 무력감에 대하여

결국 그는 주변 사람이 화를 낼 것에 대한 염려를 가장 적게 해도 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지만 원래 자신이 가장 하고 싶던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은 아예 꺼내보지도 못한다. 그 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타인에게 짓밟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그 사실에 화내지만 자신 짓밟히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178p
합리화는 정당화의 성격보다 위로의 성격을 띠고 자신의 무기력이 일시적일 뿐이라는 희망을 일깨우는 데 기여한다. 이런 위로 성격의 합리화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형태는 기적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외부의 사건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기력이 사라지고 성공, 능력, 권력 행복을 바라는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이다. ··· 또 하나의 형태는 어떤 사람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바뀌리라는 믿음이다. 흔한 (앞에서 언급한) 한 간지 사례가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매번 그곳의 의사가 기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위로가 되는 이 모든 상상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은 원하는 성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외부의 힘이나 상태가 갑자기 바라던 것을 이루어준다는 것이다. -182p
과보상의 가장 흔한 사례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은 남보다 더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기력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정도로 매우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자기 지위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그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시도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문제를 자꾸 만들지도 않고,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 일 저 일을 벌여 위험을 막기 위해 극도로 활동적이라는 인상을 일깨운다. -185p

 어쩌면 나일수도? 하는 부분이었다. 뭔가 남는 거 없이 바쁘게 사는 것 같아 가끔 '이게 뭐지'하는 무력감에 빠지곤 했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은 남보다 더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그것이 나 아닐까.

 

성공을 원한다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인정머리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성공의 비밀, 아이들에게는 잊어버리라고 설교하는 이 모든 비밀을 '엘리트'의 자식들은 제때 찾아낸다. 다수의 대중은 이 비밀을 몰라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은 평생 어리둥절하고, 사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공하고픈 욕망과 어린 시절에 배운 이상을 실천하고픈 욕망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신경증 질환을 앓는다.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아이가 진지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아이는 아직 어리석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른들의 인생 게임 규칙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p
설사 자신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해도 이런 착각이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사회에,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기본적인 힘에 대해 무지하다. 100가지 일을 보고 이것저것에 매달리고 하나를 통해 전체를 이해해보려 애쓰지만 그래 봤자 연신 새로운 일에 놀라고 당황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과 사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면, 첫 번째로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부족한 깨달음과 무지는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며, 그 무력함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동원해 절망적으로 저항한다 해도 결국 개인은 내면에서 그 무력감을 인식하게 된다. -204p

 

7.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

결핍의 심리학에서 과잉의 심리학으로 이행한 것은 인간 발전의 가장 중요한 발걸음 중 하나다. 결핍의 심리학은 불안과 질투, 이기주의를 불러온다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 과잉의 심리학은 자발성, 삶에 대한 믿음, 연대감을 생산한다. 산업화된 세상은 경제적 과잉의 새 시대로 들어서려는 참이지만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여전히 결핍의 경제 조건에 사로잡혀 있다. -212p~213p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과식, 구매, 음주가 우울증과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임상적 사례가 존재한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섹스하고 영화 보고 여행하고 책이나 강연, 미술품 같은 교양 자산을 소비한다. 적극적이고 매우 활기차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깊은 곳은 불안으로 가득하고 외롭고 울적하고 따분하다(권태는 일종의 만성 우울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소비하면 성공적으로 보상할 수 있다[프롬 1973a, GA VII, 219~227쪽 참조]). -217p
‘소비하는 인간’을 생산적 활동을 하는 인격으로 변화시켜야만 인간은 소비재를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아닌 진정한 독립으로서의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우리 전체 소득의 10퍼센트를 경제적으로 무익하며, 위험한 군사 비용에 투자하지 않을 때, 미개발 국가를 체계적으로 지원해 무의미한 폭력 행위의 확산을 저지할 때, 인구 폭발을 막을 방법을 찾을 때만 기본 소득 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 어떤 미래 계획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는 아예 없을 테니 말이다. -224p~226p

 

8.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

소비하는 인간은 모든 것을 소비품으로 만드는 인간이다. 담배와 맥주, 리큐어(알코올에 설탕과 식물성 향료 따위를 섞어 만드는 혼성주—옮긴이), 책, 사랑, 섹스, 강연, 미술관 등 그에겐 소비품으로 변신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심지어 직접적인 각성을 선사하는 특정 마약조차 그저 소비품일 뿐이다. -231p
관료적 조직의 자리마다 딱 정해진 예스와 노의 비율이 있어 꼭 지켜야 한다. 이는 무엇을 목표로 삼느냐에 달려 있다. 90퍼센트의 예스맨은 절대 사장이 될 수 없지만 90퍼센트의 노맨도 절대 사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세밀하게 매겨진 차이의 눈금이 있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학교에서는 정반대만 배운다), 실전에서만 배우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그 차이를 다 배우고 나면 너무 늙어버린 뒤다. -236p
바로 그 가짜 선택을 통해 가짜 인성이 된다. 그는 말보로를 피운다는 사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자기이며 인성이다. 선택의 행위를 통해 그는 권력을 경험한다. 사실 선택은 그저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영향의 결과일 뿐이기에 무의식적으로는 무기력을 경험하지만 말이다. 의식적으로는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제품 중 선택하도록 부추김 당한 것이다. -238p
현대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엄청나게 커지며, 나는 핵무기에 대한 자부심 역시 적어도 일부나마 기계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감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한 관심의 저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요즘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는 것은 애당초 즐길 수 없다고 믿는다. 그냥 앉아 있거나 걷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삶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없다면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241p~242p
인간에게 유익한 욕망을 찾아내는 것은 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철학적 인류학뿐 아니라 심리학적 인류학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과제는 누구보다 인간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인간을 경제에 종속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맡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토론만 하려 해도 매우 힘이 든다. -245p
활동적 인간, 생산적 인간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는 흔히 말하는 분주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 마르크스도 말했듯) 내면에서부터 활동적인 사람, 활동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사람, 세상과의 관계 맺음과 연결이 내면의 필연성인 사람이다. 그는 삶의 과정에서 쉼 없이 변하고, 모든 행위에서 같은 사람이 아니며, 정반대로 모든 행위가 동시에 그의 인성 변화다. -247p

 분주한 사람이 아닌 내면에서부터 활동적인 사람. 삶의 과정에서 쉼 없이 변하고 창의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프롬의 말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있다.

 

9. 활동적인 삶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심한 공포와 불안이 담겨 있다. 온갖 것이 다 무섭다. 자신이 불안하고, 삶이 무의미해서 겁나며, 경쟁이 두렵고, 관공서가, 부모님이, 자식들이 겁나고, 낯선 사람은 모조리 무서우며,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겁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다. 살면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일하는 사례를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사실 사람들은 불안이 자신을 몰아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불안에서, 불안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따라서 단 한순간도 자신이 불안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일하고 또 일한다. -263p

 나 진짜 세상에 무서운 게 많은 겁쟁이인데.. 일은 아니지만 분주함으로써 무서운 것으로부터, 불안하다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아닌지 되돌아봤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9. 활동적인 삶 中 일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이다. 논리적인 모순 같지만 그게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예감하고 감지하며 안다. 물론 무엇을 아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아는 것을 쫓아내는 데 사용한다. 아마도 현대인 대부분이 상당한 에너지를 아는 것을 쫓아내는 데 사용할 것이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자기 일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의식하면 자기 상황을 모두 바꿔야 하고 사회적 변화를 바라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에 그는 차라리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일, 즉 강제 노동의 고통을 인식하지 않고 일을 더 많이 해서 무감각해지려고 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심각한 자기기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매우 활동적이라 믿지만 실제로는 매우 수동적이다. 그의 활동성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지시하고 조종하는 활동성, 그에게 불어넣은 활동성이기 때문이다. -267p
많은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활동하고 강박적으로 활동적이지만 그러고 나면 활동적으로 행동한 만큼 게으르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물론 활동하고 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역시 다른 형태의 강박적 활동성일 때가 많다. 운이 좋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고 최대한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사람도 아주 많다. 그것은 ‘휴식’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휴식은 일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이다. 수동적인 일과 수동적인 휴식, 이 둘은 딱 맞는 짝이다. 충분히 쉬고 나면 다시 문제가 고개를 내밀고, 아마도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고민을 잊기 위해 일해야 한다. -269p

 주변 워커홀릭과 쉬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실제로 내면이 차있고 단단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인 사람일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강박적 활동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꽤 무겁다. 우리는 너무 강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생존하려면 지금처럼 그냥 살아가서는 안 된다.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건 절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말은 정말 쉬워 보인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게 뭐 특별하다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한번 해보면 당신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272p

프롬이 하고 싶었던 말.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을 위해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을 하자라는 말이다.


 이 책은 내 삶을 되돌아보고 살아가는 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조언해 주는 책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이 모두 맞다는 것은 아니나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었나?"라는 물음을 주기에는 나에게 충분했다.

 지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자신의 의견 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자가 살았던 시기에 핵전쟁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관심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자 의도적으로 적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래서 미발표 작품으로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핵전쟁"은 안된다고 더 적극적으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는 글에서 이상주의 책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사람을, 지구를 사랑한 저자의 마음이 드러난 것은 아닐까 싶다. 올해 초 읽기를 포기한 '사랑의 기술'을 완독 할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 최소 40년이 지난 독일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나라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40년 뒤의 우리나라 모습이 비슷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AI와 다양한 환경문제가 가득한 사회. 기술자가 어떻게든 해결해줄거야라 생각하기만 한 난 어쩌면 무기력함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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