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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좋아 읽은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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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좋아 읽은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고

화성에서 온 아이 2025. 1. 31. 15:00

'보건교사 안은영'과 '피프티피플'을 읽은 후 정세랑 작가의 에세이 신간 소식을 들었다. 읽어야지 하고 읽고 싶은 북 리스트에 올려뒀는데 결국 3년 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작가님.. 안 잊고 있었어요!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모두가 손꼽아 기다려온 책, 이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정세랑의 첫 번째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정세랑 작가는 여행을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뉴욕까지 날아가고, 이벤트에 당첨되어 런던에도 가고, 남자친구의 유학을 따라 독일에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여행기가 어쩌다가 9년 동안 계속되었고, 누구나 여행을 그리워하게 된 이때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
저자
정세랑
출판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21.06.10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내지

(  )만큼 뉴욕을 사랑할 순 없어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8p-29p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공동체에 속하면 비슷해진다. 그런 패턴을 확인할 때 스스로가 작아지기도 하지만,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내가 했던 고민을 먼저 한 사람들이 있고, 내가 했던 고민을 다시 시작할 사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 가벼워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받는 느낌이 있다. "와, 저 사람 이상하다." 그래서 "흥미롭다."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을 만나면 내 생각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결이 맞지 않더라도 대화를 나눌 때면 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있는데 가끔, 어쩌면 종종 불편한 순간이 있다.

그래도 내 자신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은 "이상하다"라는 단어를 부정적이거나 배척하기 위해 쓰지 않아서이다. 나를 내 스스로가 볼 때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평범하지 않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세랑 작가가 말한 "내가 했던 고민을 먼저 한 사람들이 있고, 내가 했던 고민을 다시 시작할 사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 가벼워지는 것" 이 부분이 공감갔다. 사건이 발생한 원인과 배경은 다르더라도 발생한 사건에 대한 고민과 대처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나만 이상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을 분명 경험했기 때문이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46p-47p
누군가 이런 여행지에서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것은 그 여행지가 유난히 선량한 장소라서가 아니라, 여행의 보드게임 판에서 던진 주사위가 좋은 숫자였던 것뿐일 가능성이 높다. 주사위에는 나쁜 숫자도 있다. 평소에도 폭력의 표적이 되는 일은 흔하지만, 낯선 장소에서 여행자들이 얼마나 두드러지는 존재인지 고려하면 확률은 더 나빠진다. 여행은 눈에 띄는 나약한 표적이 되는 걸 감수하고 하는 행위인 것이다.

 

최근 여행사고가 많아 이 문구를 보며 다시 한번 애도를 표했다. "그 여행지가 유난히 선량한 장소라서가 아니라, 여행의 보드게임 판에서 던진 주사위가 좋은 숫자였던 것뿐일 가능성이 높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 아쉽기만 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아쉬워만 했는데 앞으로 무사히 여행을 마쳤음에 감사함도 빼놓지 말아야겠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60p
관광객은 사랑스럽지만 관광산업은 사랑스럽지 않다는 걸 요 몇 년 새에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가 비대한 관광산업으로 몸살을 앓았다. 런던이나 바르셀로나 부동산 통합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기업형 부동산 회사가 건물들을 사들여 숙소로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고, 실제로 그곳에서 살며 일하는 사람들은 도심에서 쫓겨나며 기괴한 변질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제주도 또는 갑자기 관광지로 부상한 지역에 들리는 부정적 소식이 떠올랐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63p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말의 농도가 비슷한 게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만나는 내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숨이 막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상대에게 그 여백을 숨 가쁘게 채우게 하는데 말의 농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편하다니까. 그 농도가 비슷하지 않은 사람끼리 길게 보는 어려운 것 같다.

 

말의 농도 라는 표현이 참 예뻤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이 맞다.라는 표현도 좋아하는데 말의 농도라는 표현도 종종 일상에서 사용할 것 같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75p
돌바닥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 누워 있으니 30분쯤은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123p
왜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불안정한 경로를 굳이 선택한 걸까, 선택하면서도 명확하지 않았던 동기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최대 가능성을 원해.” 최대 가능성이라는 압축적인 다섯 글자로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 불완전하고 가혹한 세계에서,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해 보고 싶다고 스스로의 욕망에 이름을 붙였다. 아시아인은 어릴 때부터 겸손과 중용을 교육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한 사람의 최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대 가능성" 어쩌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단어이지 않을까싶다.

 

(  )만큼 아헨을 사랑할 순 없어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160p-161p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차별과 모멸을 겪으며 짓눌리지 않는 세계를 절실히 바란다. 행복은 열광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때 그 누구도 혼자 행복할 수 없으니까.
··· 나는 그것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어슐러 르 귄은 ‘안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 ‘믿는다’는 말이 끼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에 깊이 동의한다. 과학의 자리에 과학이 아닌 것이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48p-249p
아직 너무 젊은 사람, 선한 사람, 가능성을 채 확인하지 못한 사람도 아플 수 있다는 걸 안다. 불행은 완전한 우연으로 찾아온다는 걸 이해한다. 알고 이해하면서도 영 무뎌지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P의 이메일을 한참 기다렸다.

안녕, 잘 지내니? 이번에 한국이랑 다른 아시아 지역을 여행할 생각이야. 혹시 좀 도와줄 수 있어?

이메일은 아마 이렇게 시작되겠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했다. K에게 언제든 P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이상 스물일곱 살의 P, 서른 살의 P가 계속 독일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쩌면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날 줄지도 몰라서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다. 메일은 아주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친구가 있다.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나에게 직접적인 메시지가 오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는 내가 들은 소식이 아닐 거라는 생각. 아쉬우면서도 안타까운 그런, 그렇지만 가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54p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무서워도, 그 치려는 사람들 역시 쉽지 않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절망이 언제나 가장 쉬운 감정인 듯싶어, 책임감 있는 성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고 판단했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변화가 확산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패턴이기 때문에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합리성과 이타성, 전환과 전복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사는 종이 아니니까.

 

(  )만큼 런던을 사랑할 순 없어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348p
···작고 얇은 샌드위치를 당황하며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 테이블 분이 예쁜 샌드위치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빌려도 되겠느냐 하셔서 흔쾌히 빌려드렸다. 호주에서부터 테디베어 인형 한 쌍을 데리고 여행하며 손녀들을 위해 블로그 글을 쓰고 계시다고 했다. 테디베어를 앞에 놓았더니 그나마 정상적인 그림으로 보였다.

 

여행블로그 또는 맛집블로그를 종종 쓰고 있는 나로서 테디베어를 들고 다니며 블로그 글을 쓴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 글을 읽고 다이소가서 인형들을 둘러봤는데 테디베어가 아니어서 그런가 나와 함께 다닐 친구들을 못 찾았다.

 

책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389p
여행 전에는 기대감으로 즐겁고 여행 중에는 충만감이 차오르는데 여행 후에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어떤 여행에는 그렇지 않을까. 런던에 다녀왔을 때 유독 심해서, 집에 돌아온 밤 카메라의 메모리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찍은 사진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명히 찍었던 것 같은 사진들이 없었다. 당황해서 메모리 복원 프로그램으로 몇 번 복원도 시도해 보았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머릿속에 남은 강렬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남은 강렬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착각"한 경험. 나 또한 그랬다. 분명히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디에도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곱씹어보면 그 풍경에 매료돼 찍을 생각도 못했다든가 이건 눈에 보는 것만큼 담을 수 없어하며 단념했던 순간들이었다.


여행에세이로서 작가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나 대신 여행 다녀주신 것 같아 즐거웠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주변 지인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말의 농도가 맞아 오랫동안 연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특별한 일인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여행지보다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나와 연을 맺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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